: 울산의 가수! 조국을 사랑했던 가수! 고복수 선생님을 알아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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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가수! 조국을 사랑했던 가수! 고복수 선생님을 알아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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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히도리 입니다. 

 

울산 출신의 가수?배우?연예인?이라고 하면 누가 제일 먼저 생각나시나요?

김태희? 걸스데이유라? 서인국? 요즘핫한 한소희?장기용등 여럿 예술인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울산 최초의 가수는 바로 울산 중구의 대표인물 중 하나인 고복수 선생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은 고복수 선생님에 대해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복수 선생님은 울산 중구 병영에서 태어난 일제강점기와 현대사의 대중가수 입니다. 

 

울산 중구에서는 고복수 선생님을 기리기 위해 성남동에는 고복수음악당, 서동에는 고복수길이 존재하기도 하죠. 

 

고복수 선생님은 18세의 나이에 울산과 부산의 가요 콩쿠르에 입선했지만 서울에서 가수가 되길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고복수 선생님은 아버지가 잠든 틈을 타 장롱에서 60원을 꺼내들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을 했죠.

그리고 1933년 22세 때 콜럼비아 레코드사가 주최한 대회에서 3등을 하고 가수의 인생이 시작이 됩니다.

 
콜럼비아 레코드사가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사이 작곡가 손목인 선생님이 그를 오케레코드사로 옮겨주었는데 당시 이철 오케레코드사 사장은 전속 축하금으로 2,000원을 지급했다고 합니다.

당시 소학교 교사 한 달 월급이 40원이었는데 그 당시때는 엄청 큰 돈이죠.

이후 1934년 손목인 작곡의 ‘타향살이’와 ‘사막의 한’을 불러 인기가수가 되었고, ‘짝사랑’ ‘휘파람’ ‘이원애곡(梨園哀曲)’ ‘풍년송(豊年頌)’ 등을 쏟아내며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고복수 선생님을 알아보기 위해 울산 중구에 있는 고복수음악관으로 한번 들어가볼까요?

 

고복수 음악관의 위치는 울산광역시 중구 성남동 81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주차는 불가능 하니 근처 큰애기하우스 옆 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하시면 걸어서 금방 이랍니다. 

 

고복수음악관은 무료로 관람을 할수 있습니다. 

 

1층은 고복수 선생님의 업적을 살펴볼수 있는 박물관 형태이고 2층은 성남살롱이라고 하여 복고풍의 다방?카페가 운영중인곳 입니다. 

 

고복수 음악관 마당에는 고복수 노래비가 세워져 있는데 원래 고복수 노래비는 1987년 '고복수가요제' 출범 이후 울산 예술인들 사이에서 고복수 노래비를 세우자는 여론이 형성되어 울산 최초의 유명가수라는 점을 인정해 1991년 고복수 노래비가 세워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복수 노래비는 울산 동헌 입구 우측 북정공원에 설치가 되어 있었는데 고복수음악관이 설립이 되면서 음악살롱으로 옮겨졌습니다. 

고복수음악관으로 걸어가는 골목길인데 뭔가 7~80년대의 느낌이 물씬 나서 이색적인 데이트나 이색적인 사진찍으러 오시는분도 많은곳 입니다. 

 

다시 고복수선생님의 업적을 살펴보자면 선생님의 아내 황금심(黃琴心)은 고복수의 팬이었던 언니의 손에 이끌려 10대 초반에 선생님의 무대공연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순간 고복수의 노래에 매료돼 집으로 돌아와 축음기로 고복수선생님의 노래만 들었다고 합니다.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황금심여사님은 오케레코드사의 노래 시험에 통과해 데뷔하게 되었는데 그 면접 자리에 고복수선생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속사가 달라 두 사람은 서로 만나지 못했는데 나중에 고복수가 빅타 회사의 반도악극좌로 소속사를 옮겼고, 「옥중 춘향전」에서 고복수가 이몽룡을, 황금심이 성춘향 역을 맡으며 두사람의 사랑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친일단체였던 조선연예협회는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고복수선생님을 ‘연예인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명목으로 제명하려했고, 고복수선생님은 일본으로 잠시 피신을 했는데 그 사이 황금심여사님이 아이를 낳았고, 이로인해 양가부모님들도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해주었습니다.

 

그 후 두사람이 듀엣으로 노래를 많이 불렀다고 합니다. 

 

또 고복수선생님은 일본과 만주 등지에서도 활동했는데 고복수 선생님이 만주 하얼빈이나 용정 북간도에서 타향살이를 불렀을 때 우리나라 동포들은 너나할 것 없이 눈물의 대성통곡을 음악을 감상했다고 합니다.

 

1950년 6.25전쟁 때 김일성이 고복수선생님을 체포해 북으로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은 계수남은 가극 동맹이라는 좌익예술단체의 중책을 맡고 있었습니다.

 

계수남은 고복수선생님과 황금심선생님을 북한으로 데리고 갈려고 했으나 고복수선생님이 임신한 아내는 보내달라는 말을 했고, 황금심여사님은 떡장수로 변신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형이 조국을 등지고 북한에 끌려가는 것을 견디지 못한 남동생은 원산 근처에서 형을 살리려고 형을 웅덩이에 밀친 덕분에 겨우 탈출한 고복수선생님은 국군을 만나게 되었고, 국군이 암호를 대라고 하자 “타향살이”라고 대답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고복수음악관 한편에는 고복수선생님의 여러레코드를 청취할수가 있는데 그 시대때의 음악을 느껴볼수가 있었습니다. 

그 중 고복수 선생님의 짝사랑은 박정희 전대통령님의 애창곡이라고 하네요. 

가사를 잠시 살펴보자면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젖은 이즈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멥니다

아아 뜸북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잃어진 그 사랑이 나를 울립니다
들녘에 떨고 섰는 임자 없는 들국화
바람도 살랑살랑 맴을 돕니다

 

요즘 노래들과 느낌이 많이 틀리죠?

고복수 선생님의 여럿노래와 가사를 살펴보면 그시대의 배경을 느낄수가 있었습니다. 

 

고복수음악관을 전부 둘러보고 2층 성남살롱에서 음료한잔과 고복수선생님의 음악을 곱씹어 봅니다. 

 

고향과... 가족과... 조국을... 사랑했던 고복수선생님

쫌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분들은 울산 성남동의 고복수 음악관에 한번 방문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상 히도리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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