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히도리 입니다.
울산에서 꼭 가보셔야 되는곳!
한글 도시 울산 중구에 있는 외솔최현배선생기념관을 아시나요?
한글이 목숨 : 최현배 선생님을 한번 알아보도록 하죠.
외솔기념관은 울산 중구 병영12길 15 외솔최현배선생기념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주차장도 있답니다.
가장 먼저 보이는것은
외솔 최현배 선생님의
임생각 시가 보입니다.
이 시는 1945년 봄 함흥 옥중에서 조국광북을 기다리며 읊은 글 입니다.
외솔기념관은 무료로 방문이 가능하며 오전9시부터 오후6시까지만 방문 가능합니다.
한글이라고 하면 세종대왕이 가장 먼저 떠오르겠지만!
한글이 목숨이라고 외쳤던 최현배 선생님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최현배 선생님은 1894년 10월 19일 울산광역시 중구 동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이후 울산군 병영성 내부에 살았으며, 상경한 뒤에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행촌동 146-1번지에 거주를 한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학생 시절 한힌샘 주시경을 처음으로 만나 조선어학강습원에서 국어학 및 국어문법 등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후 3.1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를 거쳐 히로시마에 있는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에 한국인 학생으로 입학하여 졸업했으며 이때 중학교 교사 자격증을 받았으나 이후 조선으로 귀국하여 고향인 울산으로 귀향한 후 조선인 상권확보의 목적으로 공동상회를 설립하게 됩니다.
1920년에는 부산에 있는 동래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재임하였으며 1922년에 교토로 건너가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 교육학을 전공하고 1925년 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그해 동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수학하였습니다.
1930년 조선총독부의 "언문 철자법" 제정 사업에 같은 주시경 학파인 권덕규, 신명균, 심의린, 정열모 등과 함께 참여했습니다.
(좀 더 알고싶으신분들은 영화'말모이'를 추천드립니다.)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 검거, 구금되었고, 1943년 9월 함흥형무소에 이감되었습니다.
그 뒤 공판에 회부되어 1945년 1월 16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이에 공소했으나 공소가 기각되었고, 상고까지 했으나 1945년 8월 13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 8.15 광복이 되면서 석방되었습니다.
해방 이후는 미군정청 편수국장이 되어서 국어 교과서 행정을 담당하였고 미군정의 자문기관이던 조선교육심의회의 전체회의에서 교과서와 공문서의 한글전용과 가로쓰기를 통과시키도 했으며 1948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정부 공인 로마자 표기법인 '한글을 로오마자로 적는 법'과 외래어 표기법인 '들온말 적기법'을 제정하는데 그의 이론이 반영되기도 했습니다.
현대 국어에서 큰 이바지를 하신분이시죠.
또 1951년에는 피난지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승인으로 문교부 편수국장을 맡았으며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울산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김택천 후보에 밀려 낙선하기도 했습니다.
휴전 후인 1954년 서울특별시로 돌아오게 되면서 연희대학교로 복직하여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고 이후 문과대학장, 부총장을 맡았으며 1958년에 학술원 부원장이 되었습니다.
1955년 연희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를 받았으며, 1959년 교수직에서 정년 퇴임
연세대학교는 2001년 문과대학 건물(구 인문관)을 그의 호를 딴 "외솔관"이 있기도 합니다.
1962년 생존인물로서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으며, 1970년 노환으로 향년 76세를 일기로 타계한 최현배 선생님
그의 유해는 2009년 9월 2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이 되어있습니다.
최현배선생님의 익힘에 주는 글
최현배선생님의 맞힌보람
최현배선생님의 건국공로훈장과 훈장증
어린시절부터 나라사랑의 정신이 가슴 한켠에 있었던 최현배 선생님
그의 애국심은 말과 글에서 엿볼수가 있습니다.
"말과 글은 우리의 얼이다"
이해가 안되시는분들은 진짜 영화 '말모이' 꼭 시청 바랍니다.
영화다 보니 각색된것도 많이 있지만 조선어학회 사건을 쉽게 볼수가 있으며 영화를 보고 외솔기념관을 방문하는것도 좋은 선택입니다.
훨씬 관심을 가지고 한글이 목숨 이라는 뜻을 볼수가 있거든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후에도 한글은 우리나라의 공식 문자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사대부들은 여전히 어려운 한문을 사용했고 한글은 아랫사람들이 배우는 글이라고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최현배 선생님 덕분에 한글이 우리나라의 공식 문자로 인정받은것이 일단 가장 큰 업적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공식문자가 인정이 되면서 맞춤법이 통일되지 않아 사용이 제각각이었고 이후 일제강점기 때 학교에서 국어 과목으로 일어를 가르치면서 한글은 온전한 우리글로 자리 잡지 못하게 되었죠.
우리가 지금 한글을 사용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말을 지키고자 했던 한글학자들의 힘이 크다고 할수가 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외솔 최현배(1894~1970) 선생님이죠.
최현배 선생님은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키면 언젠가 독립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한글을 지키는 일은 목숨을 내놓은 일과도 같았지만 최현배 선생은 한글과 애국심을 포기를 하지 않고 조선어연구회 회원들은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고 사전을 제작하는 데에 힘을 쓰기도 했죠.
계속해서 영화 말모이를 말씀을 드리게 되는데...
영화 홍보도 아니고 관심이 없었던 일반인이 조선어연구회를 더욱 쉽게 알수 있는것이 영화 말모이라서 그래요.
그냥 영화 한편만 보시면 조선어사전을 만들기 위해 얼만큼 고생을 하고 목숨을 걸었는지 알수가 있거든요.
아무튼 그 덕분에 표준어라는 개념이 없었던 당시 표준어라는 의미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영화 '말모이'에서 출신 지역이 다양한 걸인들을 모아놓고 물건을 하나씩 보여주면서 그 물건을 지칭하는 단어를 말하게 하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그 당시때 표준어를 정립시키기까지 얼마나 어려움이 있었을까...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1930년대에 들어 일제가 민족말살통치를 펼치면서 우리말을 보전하려는 한글학자들에 대한 압박도 커져만 갔고, 결국 사전 인쇄를 앞둔 1942년 일제는 최현배 선생을 포함한 100여 명의 한글학자들을 체포...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한글이 목숨 이라는 문구를 만들었던 최현배 선생님 입니다.
아무튼 체포되면서 조선어학회의 사전 원고도 행방불명이 되는데 옥살이를 했던 한글학자들은 해방 후 풀려나게 되고 사전 원고는 서울역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됩니다.
이후 한글학회에서는 1947년부터 1957년까지 10년에 걸쳐 <큰사전>의 6권을 모두 발간이 되었습니다.
큰사전은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일반어뿐 아니라 전문어, 고유명사, 옛말, 이두 등을 모두 수록한 사전인데 모두 외솔기념관에서 찾아볼수가 있습니다.
이상 외솔기념관에서 최현배선생님의 일생을 엿보았고 외솔기념관 야외도 한번 알아볼까요?
외솔기념관 근처에는 외솔한옥도서관도 있습니다.
소설책부터 아동 서적까지 다양한 장르의 책들을 구비하고 있어 외솔기념관을 관람 후 한번 방문해보세요.
옥상에는 울산 중구 대표 캐릭터 울산큰애기와 함께 아이들이 뛰어놀수 있는 공간도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최현배 선생님의 생가터와 무덤비를 볼수가 있습니다.
최현배 선생 생가터
이렇게 울산의 대표적인 인물 최현배 선생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최현배선생을 조금 더 알아보기 위해 외솔기념관에 한번 방문해보세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영화를 보고 오시던가 사전 공부를 하신다면 더 재밌게 관람을 하실수가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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